책 그리고 생각
태백산맥 _ 조정래
화곡동도깨비
2023. 12. 30. 19:18
<태백산맥>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유독 기억에 남은 장면. 야학을 운영하는 기독교인 서민영과 그를 찾아온 월남한 목사 황순직 사이의 대화.
"예에, 월남을 하셨다고요?"
서민영은 차로 혀를 축였다.
"그 빨갱이놈들의 탄압으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 아까운 교회 다 버리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읍니다. 빨갱이라면 아주 치가 떨립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사탄입니다. 이북 목회자들은 예수님 다음가는 수난을 당한 겁니다."
말이 진전됨에 따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가는 황순직을 서민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차로 혀를 적셨다.
"그럼 반공주의자가 되셨겠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내 원수, 아니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원숩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공산주의가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사탄이니까 그렇지요."
"생각이 분명하시군요."
서민영의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스쳐갔다. '단순'이라고 나오려는 말을 '분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성경 말씀의 예언이니까요."
저리도 단순한 사람은 얼마나 속이 편할까. 그러나 이 땅의 기독교가 문제로구나. 서민영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